0.

흔한 사랑 얘기가 아니라는 영화 첫 부분의 나레이션에 어디 그런가 보자고 코웃음을 쳤지만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되었다.
TV를 켜도 책을 펴들어도 노래를 들어도 모두가 '사랑'을 말하는데,
손만 잡으면 사귀는 줄 알았다던 좋은 시절은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아무리 친밀해져도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어장관리'의 가능성에 벌벌 떨며 밤잠 못 이루고
결혼한 커플의 열의 아홉이 이혼을 하는 것을 보며 사랑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절망하는
지금, 2010년.
지금 세대 젊은이들의 연애에 관한 고민을
가장 현실적으로
가장 건설적으로
풀어낸 영화이다.

1.

첫 3개월 동안,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황홀한 과정.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찬 새로운 세상.
설레고 행복한 그 감정이 그대로 지속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우리는 안다.
얼굴을 마주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순간은 오고야 만다.
봄날은 간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여름날은 간다라고 해야 맞겠지만.
우리는 다 한 번쯤은, 봄 다음에 다시 봄이 오고, 그다음에도 또 봄이 올 것을 기대하며 대책없이 봄 내음에 머리 끝까지 몸을 담궜던 적이 있다.

2.

천생연분을 믿었던 톰.
사랑은 판타지라고 단정했던 썸머.
어느 쪽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은 양 극단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3.

소울메이트는 없다.
그렇지만, 사랑은 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인연이라는 이유로 원만하게 풀려나가는 관계란 없다.
인연은, 관계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수만 가지의 가능성으로 가득 찬 이 우주에서
하필이면 그때 내 눈앞에 나타난 단 하나의 가능성을 꽉 움켜쥐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우연이다.
움켜쥘 때 비로소, 대답이 예든 아니오든, 누구의 것도 아닌 떠다니던 가능성은 자신만의 현실이 된다.

4.

건설-구축-설계.
자신의 삶의 중심을 되찾아오는 과정을 건축이라는 소재로 정확하게 표현한 것 같다.
실연의 과정은 살던 집을 부수고 새집을 짓는 것이다.
네가 없어도 이어질 삶을 다시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5.

두려움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말하고 싶다면, 말해야 한다.
이 여자를, 이 남자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더 원하는 것이 있어도 그저 참고 속으로 삭이는 것은 한심하다.
자신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실례다.
고백했다 차이면 뭐 어때.
먼저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고마워' 같은 힘 빠지는 대답을 듣고 허무함에 한숨을 푹푹 내쉬면 어때.
yes를 얻어낼 기회를 가져봤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가질 수 없었던 기회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가질 수 없었던 허무함이다.
무언가를 해서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해도
어차피 무너질 거라며 아무 건물도 짓지 않는 멍청하고 게으른 짓보다는 훨씬 낫다.
결국, 죽을 때까지 극복해야 할 것은 두려움이다.
넓고 넓은 가능성의 바다를 마음속에 담을 때,
두려움의 극복은 조금 쉬워진다.

+6.

이 영화가 깔끔하게 이해되는 걸 보니
연애 한번 못해본 나도 '좋은 경험'의 덕을 꽤 봤나 보다.
지금까지처럼,
두려움을 버리고,
나만의 건축은 멈추지 않고,
손을 내밀어 보는 거다.
언젠가 끝이 있을 것을 알지만,
그 사실에 너무 절망하지도 말고.

+7.

니 요리는 짝사랑이다.
니 요리를 사람들이 인정하고 좋아해 줄 거라는 자신감과 확신이 부족하다.
요리사 스스로 확신이 없는 요리는 포크와 나이프를 꼬시지 못한다.
짝사랑만 하지 말고 꼬셔봐. 제대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쉐프.

+8.

너도, 나도 두려움에 대처하는 능력이 너무 부족했다.
용기를 내자.
용기를 내서 제대로 살자.

+9.

처음에 남자 주인공 보고 쿠보즈카 요스케씨가 웬일로 미국 영화에 나왔나 했다. 둘이 만나면 위험해 죽을 거야 둘 다 훈남인데 엉엉 안돼 만나지 마!

+10.

호평이 자자했던 OST도 역시 영화 분위기에 맞게 굉장히 컨템포러리한 음악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루니씨의 노래가 나와서 더 좋았다.
조만간 OST 사러 가야지.

2010/01/26 21:54 2010/01/26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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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ivvy 2010/01/27 16:1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 영화 보러 가려고 안그래도 생각중이었는데. 음. 보러가야겠다.

    • 크리스티 2010/01/28 09:26  address  modify / delete

      전체적으로 정말 좋았어. 음악도 좋고 시각효과도 괜찮고 메시지도 괜찮고 남주도 괜찮고 ㅋㅋㅋ 꼭 봐 :)

  2. 밀랍마녀 2010/03/06 00:0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전 못봤는데 친구들이 보고와서 잠깐 얘기해줬어요..
    1. 영화보고왔는데 기분이 처짐..
    2. 남주는 히스레저 닮아서 급호감 생기려다 좁은 어깨땜에 실망...
    클로저 이후로 현실적인 연애담인가요?? 봐야겠어요 ㅎㅎ

    • 크리스티 2010/03/06 19:55  address  modify / delete

      히스레저 닮았단 생각은 안했는데 듣고보니 또 그러네요... 전 개인적으로 좁은 어깨 나쁘지 않아서 좋더라구요 ㅋㅋ 영화에 몰입도 잘되고. 클로저보다는 훨씬 샤방샤방하고 풋풋한 영화에요. 감각있는 느낌의 영화미술도 마음에 들었어요. 특히 색감에 많은 신경을 쓴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