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Feel Alright
 02. TV Show
03. December
04. Save
05. Rock Doves
06. 그런 너
07. Wonderland
08. 빙하



짙은의 1집 앨범은 비범했다. '있는 그대로 와'라고 절규하듯 외치는 발라드도, 쓸쓸함을 담담히 말하는 모던 락 넘버도, 일렉 기타를 내세운 빈티지한 트랙도 있었다. 모든 트랙의 멜로디는 너무 섬세해서 오히려 강렬했다. 무엇보다 발군인 것은 그 모든 정서를 아우르는 깊은 애절함을 담은 보컬이었다. 마이 웨이, 마이 페이스를 고수하는 뮤지션들이 비교적 많은 인디 시장에서, 완급 조절 없이 처음 트랙부터 끝 트랙까지 같은 분위기로 일관하는 지루한 앨범들이 심심치 않게 있는 모던락 장르의 앨범들 중에서 슬프지만 흥미로운 짙은의 앨범은 그래서 특별했다.

EP로 돌아온 짙은은, 1집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다양한 분위기나 비교적 빠른 템포의 밝은 노래들로 흥미를 끌어당기지는 않는다. 나쁘게 말하자면 지루해졌고, 좋게 말하자면 수수해졌다. 나쁘게 말하자면 게을러졌고, 좋게 말하자면 일관성이 생겼다. 느린 템포의 곡들이 주를 이루고, 전작의 '곁에' 처럼 클라이막스에서 폭발하는 절절한 감성을 노래하지도 않는다. TV Show와 Rock Doves가 굳이 꼽자면 분위기를 전환하는 역할을 하지만, 조용하고 다운된 템포의 전체적인 앨범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솔직담백한 가사와 발군의 보컬은 여전하지만, 처음 앨범을 듣고 나서 1집만큼 구미가 당기지 않아 조금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짙은의 이번 EP는 한 번 듣고 지루하다는 판정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앨범이다. 한 번에 흥미를 끌어당기지는 않지만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1집에서 보여주었던 특유의 감성은 점점 짙게 다가온다. 따뜻한 위로, 그리움과 체념, 결코 머리 끝까지 젖어들지는 않는 무덤덤한 외로움을 말하는 사려 깊은 가사들과 섬세한 멜로디의 조합은 여전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밝은 분위기와 빠른 템포, 자극적인 가사와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전자음이 있는 음악이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음악보다 귀에 들어오는 것은 더 빠르지만, 그런 겉맛만이 음악의 전부는 아니다. 음악 감상은 그냥 귀에 들리는 대로 듣는 것만은 아니다. 대충 듣고 치우지 않고 여러번 되풀이해서 들을 줄 아는 인내심과 차분한 마음을 갖추고 집중해서 음악을 들을 때 더 깊게 스미는 음악들이 있다. 3분을 기다려야, 진하게 우러나온다.

10분을 기다려도 잘 우러나오지 않는 불친절한 앨범들도 많고, 그런 앨범들이 전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앨범은 그렇게 오래 참아야 하는 난해하고 자의식에 찬 앨범은 결코 아니다. 평범한 듯 짙은 감성을 맛보려면 3분 동안의 적절한 집중과 인내심이면 된다. 조금만 차분하게 들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런 앨범에까지 '대중성을 요함'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성질 급한 세상에서 자극적인 음악에 밀려 사라지는 은근한 음악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대중이 이 앨범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조금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한 줄 요약:
당신을 향한 짙은의 음악은, 뜨거운 물을 부으면 바로 되는게 아니라, 3분을 기다려요 홍차 우려내듯이.
2010/07/31 12:45 2010/07/3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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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물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공감이 스며들 틈이 없다. 포스터와 감독 이름을 보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짧은 순간의 느낌을 미세하게 묘사하는, 사려 깊게 선택된 색감으로 채워진 영상을 보고 있자니 왕가위 이름 석 자가 바로 떠올랐다. 톰 포드가 좀 더 절제되고 도시적인 느낌인 것이 다를 뿐. 외로움, 순간의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왕가위의 영화들과 이 영화에서는 비슷한 냄새가 난다. 큰 사건 없이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지만 그 중에서 아름다운 순간들만을 주의깊게 골라서 극대화시킨 영상들의 집합.

 첫 데이트에 나가는 여자가 안절부절 못하다가 향수를 조금 과하게 뿌린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외출한 것처럼, 톰 포드의 첫 번째 영화는 치장이 조금 과하다. 영화에는 고급스러운 아이템만이 가득하다. 그 고급스러움이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한다. 혼자 남은 남자의 외로움과 절망, 그 절망을 살고 싶은 마음으로 돌려놓을 정도의 삶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 이 영화의 중심인데, 그러한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들이 너무 신경써서 배치해 놓은 온갖 물건들과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무리하게 시도한 여러 가지 촬영 기법 때문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몇몇 장면에서 이야기의 흐름과는 별로 상관도 없는 과한 치장이 눈에 띄었다.
 영화 초반의 화장실에서 어기적어기적 나오는 씬은 그래서 불편하다. 예쁘게 짜여진 세트 안에 못생긴 생활이 갑자기 끼어들어 전혀 조화되지 않는 느낌이다. 감독은 그 씬을 통해 영화에 솔직함과 자연스러움을 조금 가미하려고 한 것 같지만, 오히려 일부러 보여주는 것 같은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너무나 뻔한, '설정'이라고 크게 써붙인 듯한 결말은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갑갑함으로 채워버린다. 지나치게 이야기의 완결성을 추구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이 결말로 완전히 끝을 맺었다. 그 이후에 이어지게 마련인 구차한 생활, 빛바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삶 같은 것에는 영화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마지막 대사처럼 그저 아름답고 로맨틱한 순간이 전부라는 듯. 물론 그러한 영화의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야 없지만, 왕가위의 영화에서와 같은 삶에 대한 보편적인 성찰이 이 영화에는 없는 것이 아쉽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깊게 공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상처를 껴안고 버텨내는 구질구질하지만 위대한 삶을, 이 영화는 거부한다. 그보다는 아름다운 환상을 그려내고자 한다. 분명히 '아름답다'는 면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성공이다. 바다로 뛰어드는 씬 하나만은 마음을 저릿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같이 본 언니는 두 시간짜리 뮤직비디오를 본 느낌이라고 했다. 대충 비슷한 느낌이었다.
2010/07/13 17:27 2010/07/1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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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만큼 보인다. 함께한 시간들이, 조금씩 느꼈던 친근함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들이, 의식적으로 들인 노력들과 시간들의 무게로 다져진 단단한 관계가 혼란을 없애고 적어도 이 관계 안에서의 너와 나를 규정한다. 나는 너와 10년동안 친구를 했고 옆에서 지켜봐왔고 수많은 사건들을 겪었기 때문에 너를 안다. 너를 아는, 너를 소유하는 딱 그만큼 나는 너를 본다.
 보는 만큼 안다. 선험적인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그 자리에 가서, 그 자리에서 본 것을 느끼면 그게 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을 처음 보았음에도 나는 당신을 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나는 당신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안다.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일까? 그렇게 긴 시간동안 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내 오랜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 내게는 '보인다'. 당신을 알아야 하는데도, 아는 것이 마땅한데도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한다. 보지도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보는 것이 정말 보는 것일까? 내 시선은 왜곡되어 있을 뿐이 아닐까? 내가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착각이 아닐까? 나는 단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다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보았을 때, 그것 또한 내가 본 것이니 엄연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담담하게 인정할 수 있을까?

 사실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너와 나는 그럼에도 웃고 사랑하고 관계를 맺고 술잔을 부딪치고 어깨를 감싸안는다. 따지고 들면 제대로 아는 건 없다. 다 알았다고 생각했을 때, 언제나 어디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까맣게 몰랐던 부분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내민다. 본 것으로 되었다고, 본 것이 전부라고 위로하고 다그치기에는, 그 불안정한 자유는 너무나 너무나 무섭고 외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내가 본다고 생각하는 만큼 보고,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아는 수밖에. 힘빠지는 소리일지 모르지만, 옆에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 보는 누군가와 즐거움에 겨워 함께 웃을 수도 있는 이 삶은 그렇게 무섭고 캄캄한 것만은 아니다. 뭐 어때. 바보면 뭐 어때. 그냥, 사는 거다. 손 꼭 붙잡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단란했던 마지막 씬의 커플은 그렇게 온 몸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아, 이거구나, 싶었다.

 빛나는 커플도, 차인 남자도, 찌질한 남자도, 고민하는 여자도, 누구 하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절망하고 있지는 않았다. 홍상수 영화는 이번이 두번째라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위화감은 잘 모르겠지만, 넘치는 웃음으로 기어이 덮으려 했던 바보 장님들의 끔찍한 절망의 뒷맛은 씁쓸하게 남아있었다. '밝은' 영화는 아니지만 긍정적인 영화인 것은 확실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허탈함과 무력감과는 다른, 그러나 결코 찬란하지는 않은 행복이, 이 영화에는 분명히 있었다.

 자매품: 오지은 '인생론'
 '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우울한 모던락 소년소녀도 고독한 고양이과 사람들도 혼자가 좋을 리는 없어요' 얼핏 보아 둘 다 명랑하게만 들리지만 사실은 꽤 상반된 의미의 두 가사가 하나의 노래 안에서 한껏 밝은 철없는 목소리로 불려지고 있다. 오지은과 홍상수의 '투명한 느낌'은 굉장히 닮아 있다. 둘 다 허세를 극도로 경계해서 그런가 보다.

2010/06/06 21:13 2010/06/06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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